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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정책


KENOSIS, RUIS AND

KAIROS




선교적 토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 

'기능적 선교에서 존재적 선교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도전받는 선교

오늘날 세계는 다종교, 다문화 사회로 급속히 전환되었습니다. 다양한 종교들과 이주민의 급속한 유입으로 다문화적 가치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종교/문화적 가치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선교를 본질로 하는 교회 공동체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마주한 교회와 기독교 선교의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근본적인 질문 던지고 십자가에서 답 찾아야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기능적 접근보다는 ‘선교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선교의 모범을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선교가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경구절을 꼽으라면 단연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기독교 선교는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을 주님의 위치로 자리매김하여 주님이 내게 주신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결과물로 얻어내기 위해 상대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이미 상대를 도구화하고 내 계획의 틀 속에 가둬넣는 것으로 결코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실하게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원하셨지 결코 우리의 자발성을 무시하거나 꺾어버리는 강요나 폭력의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상대가 내 앞에 있고 그 상대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예수님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물론 내 앞에 있는 상대가 나에게 늘 유익한 사람일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 즉 누군가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나에게 무척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로 마주치는 위험한 만남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위험한 이들 앞에서까지 자신을 세우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진심 속에 묻어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방식대로 선교를 실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독교 선교 본연의 의미요 방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와는 너무 다른 선교

그러나 교회가 박해 시기를 지나고 제국의 교회가 된 이후 행해진 교회의 선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미션(Mission)’이라는 표현이 가진 의미로서의 선교 즉 근대의 기독교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를 역행하는 ‘결과 지향적’이고 ‘선교를 행하는 사람이 중심’이 된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선교의 상대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대상(도구)으로 여기게 되었고, ‘선교를 행하는 사람’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은 그것이 살인일지라도 허용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자신들의 선교를 위해 취했던 대표적인 방식들로 배재, 동화, 관용 등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선교는 내용으로나 방식으로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를 가능케 할 인식의 대전환

임마누엘 레비나스 같은 타자(他者)철학자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선교와 다른 선교 방식을 낳는 이유를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따라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상대방)를 끊임없이 가르는 우리 인식의 습성에서 찾습니다. 이런 태도가 이성을 절대화하는 근대적인 태도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사고의 특징은 이성의 절대화입니다. 절대적 이성을 가진 나는 나와 상대를 끊임없이 분리합니다.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인식하고 나 아닌 상대를 내 방식대로, 내가 편한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앞서 말씀드린 배제, 동화, 관용의 방식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은밀하게 녹아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교와 다른 선교 이해와 방식을 고집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선교를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의 이성을 절대화하는 나 중심적인 자아를 탈피하여 관계적 존재로서 상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일상에서 나를 내어주는 선교를 연습하라 

다종교, 다문화 상황이 위기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교회에 있어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능력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선교를 바라보는 이해와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나를 내어주는 실천으로써의 선교로 나아가야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 안에서의 훈련과 실천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먼저 지금 마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배려와 존중으로 마주하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하셨습니다. 누군가로부터 통제받는다는 느낌, 감시당한다는 느낌, 부자유하다는 느낌보다는 누구나 교회공동체가 사랑 안에 용납되어 기댈 수 있는 따스함을 느끼는 곳, 내 영혼의 놀이터로 느끼고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서로를 향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 내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들은 내게 맡겨진 구성원들이 모임을 통해 예수 안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기독교 복음은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해 왔습니다. 시대마다 엄청난 박해와 핍박이 있었지만 복음은 교회를 여기까지 인도해 왔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환경의 위기가 아닙니다. 시대의 위기가 아닙니다. 교회 자체의 위기입니다. 복음에 대한 오해와 믿음의 상실이 사실 현대 선교의 위기입니다.

“하늘의 별이 빛을 잃지 않는다면, 날이 어두워질수록 별은 더욱 더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이 보이신 복음의 내용과 복음의 방식을 굳게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지금 교회와 세상의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보다 더 넓은 곳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서 오히려 결정 장애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누가 자신의 삶에 참된 의미와 재미를 공급해 줄 수 있을지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고안해 낸 선교의 틀로 복음을 왜곡, 축소시켜서 세상이 말하는 진리와 경쟁시켜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선교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 안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알아가고 서로의 만남 속에 영과 육이 새로워진다면 그리스도의 선교를 경험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전파하는 역동적인 공동체로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

'기능적 선교에서 존재적 선교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도전받는 선교

오늘날 세계는 다종교, 다문화 사회로 급속히 전환되었습니다. 다양한 종교들과 이주민의 급속한 유입으로 다문화적 가치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종교/문화적 가치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선교를 본질로 하는 교회 공동체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마주한 교회와 기독교 선교의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근본적인 질문 던지고 십자가에서 답 찾아야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기능적 접근보다는 ‘선교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선교의 모범을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선교가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경구절을 꼽으라면 단연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기독교 선교는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을 주님의 위치로 자리매김하여 주님이 내게 주신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결과물로 얻어내기 위해 상대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이미 상대를 도구화하고 내 계획의 틀 속에 가둬넣는 것으로 결코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실하게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원하셨지 결코 우리의 자발성을 무시하거나 꺾어버리는 강요나 폭력의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상대가 내 앞에 있고 그 상대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예수님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물론 내 앞에 있는 상대가 나에게 늘 유익한 사람일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 즉 누군가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나에게 무척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로 마주치는 위험한 만남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위험한 이들 앞에서까지 자신을 세우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진심 속에 묻어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방식대로 선교를 실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독교 선교 본연의 의미요 방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와는 너무 다른 선교

그러나 교회가 박해 시기를 지나고 제국의 교회가 된 이후 행해진 교회의 선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미션(Mission)’이라는 표현이 가진 의미로서의 선교 즉 근대의 기독교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를 역행하는 ‘결과 지향적’이고 ‘선교를 행하는 사람이 중심’이 된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선교의 상대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대상(도구)으로 여기게 되었고, ‘선교를 행하는 사람’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은 그것이 살인일지라도 허용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자신들의 선교를 위해 취했던 대표적인 방식들로 배재, 동화, 관용 등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선교는 내용으로나 방식으로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를 가능케 할 인식의 대전환

임마누엘 레비나스 같은 타자(他者)철학자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선교와 다른 선교 방식을 낳는 이유를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따라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상대방)를 끊임없이 가르는 우리 인식의 습성에서 찾습니다. 이런 태도가 이성을 절대화하는 근대적인 태도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사고의 특징은 이성의 절대화입니다. 절대적 이성을 가진 나는 나와 상대를 끊임없이 분리합니다.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인식하고 나 아닌 상대를 내 방식대로, 내가 편한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앞서 말씀드린 배제, 동화, 관용의 방식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은밀하게 녹아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교와 다른 선교 이해와 방식을 고집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선교를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의 이성을 절대화하는 나 중심적인 자아를 탈피하여 관계적 존재로서 상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일상에서 나를 내어주는 선교를 연습하라

다종교, 다문화 상황이 위기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교회에 있어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능력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선교를 바라보는 이해와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나를 내어주는 실천으로써의 선교로 나아가야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 안에서의 훈련과 실천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먼저 지금 마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배려와 존중으로 마주하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하셨습니다. 누군가로부터 통제받는다는 느낌, 감시당한다는 느낌, 부자유하다는 느낌보다는 누구나 교회공동체가 사랑 안에 용납되어 기댈 수 있는 따스함을 느끼는 곳, 내 영혼의 놀이터로 느끼고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서로를 향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 내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들은 내게 맡겨진 구성원들이 모임을 통해 예수 안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기독교 복음은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해 왔습니다. 시대마다 엄청난 박해와 핍박이 있었지만 복음은 교회를 여기까지 인도해 왔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환경의 위기가 아닙니다. 시대의 위기가 아닙니다. 교회 자체의 위기입니다. 복음에 대한 오해와 믿음의 상실이 사실 현대 선교의 위기입니다.

“하늘의 별이 빛을 잃지 않는다면, 날이 어두워질수록 별은 더욱 더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이 보이신 복음의 내용과 복음의 방식을 굳게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지금 교회와 세상의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보다 더 넓은 곳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서 오히려 결정 장애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누가 자신의 삶에 참된 의미와 재미를 공급해 줄 수 있을지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고안해 낸 선교의 틀로 복음을 왜곡, 축소시켜서 세상이 말하는 진리와 경쟁시켜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선교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 안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알아가고 서로의 만남 속에 영과 육이 새로워진다면 그리스도의 선교를 경험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전파하는 역동적인 공동체로 서게 될 것입니다.